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사회주의 고전 읽기] 《프랑스 내전》 ─ 최초의 노동자 권력, 파리 코뮌

김지윤 179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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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에르가 코뮌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하는 데에는 1주일이나 걸렸다. 노동자들은 끝내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의 묘비를 엄폐물 삼아 티에르 군대의 기관총에 맞서다 죽어갔다. 2만~3만 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역겨운 공화정은 “자기가 살해한 사람들의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걱정했다. 19

코뮌의 실수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활동과 역사적 의의를 돌아보며 당시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 및 코뮌에서 득세했던 블랑키주의와 프루동주의의 한계가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블랑키주의는 급진적이었지만, 노동계급을 대신해 행동하는 소수 음모가들의 구실을 강조하는 경향이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은 개인의 자유를 가장 중시하며 정치 행동을 거부했고, 노동계급이 집단적으로 건설한 새로운 권력이 아니라 협동조합이면 충분하다고 봤다.

이런 정치적 약점은 두 가지 부적절한 결정에 영향을 줬다. 첫째, “3월 18일 공화정이 파리에서 도망칠 때, 그 수중에 남아 있는 군대는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그때 국민방위대가 베르사유로 진격했다면 공화정의 군대를 총 한 방 쏘지 않고 해산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20 그러나 “파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공격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펼치는 대신에, 스스로를 자치공동체 안에 고립시키려 했다.” 21 그 때문에 티에르는 병력을 끌어모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둘째, 코뮌은 프랑스 은행에 도전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금은 이곳에 있었으므로 코뮌이 금을 몰수했다면 티에르의 돈줄을 끊고 프랑스 경제를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엥겔스는 이렇게 지적했다. “코뮌이 프랑스 은행의 문전에 공손히 머물러 섰던 [것은] … 커다란 정치적 오류였다. 코뮌의 수중에 있는 은행, 이것이야말로 만 명의 인질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일이다. 그렇게 하였더라면 프랑스의 부르주아지 전체는 코뮌과의 강화에 관심을 갖도록 베르사유 정부에 압력을 가했을 것이다.” 22 그러나 프루동주의와 블랑키주의 전통 모두 “재산권”에 대한 공격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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