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사회주의 고전 읽기] 《프랑스 내전》 ─ 최초의 노동자 권력, 파리 코뮌

김지윤 179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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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군대에 맞서 도시를 방어하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기아와 추위를 견디면서도 국민방위대에 앞다퉈 자원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국민방위대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됐다. “1792년 상퀼로트의 후손들이자 1848년 투사들의 아들딸들이 다시 무기를 들었던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무장한 파리, 그것은 무장한 혁명이었다.” 6

대부분 부르주아지로 구성된 공화정 정부와 무장한 노동계급 사이의 대립은 날로 커졌다. 1870년 10월 좌파의 정부 전복 시도에 이어 이듬해인 1871년 1월 22일에 또 한 번 정부 전복 시도가 벌어졌다. 정부는 이를 가까스로 진압했지만, 다음번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내전”에 직면한 부르주아 정부는 1월 23일에 항복 조건을 두고 비밀리에 프러시아와 협상했다.

부르주아지 대부분이 내버리고 떠난 파리를 가까스로 방어해 온 노동자·빈민들은 분노에 휩싸였다. 이들은 오랫동안 포위의 고통을 자신들에 떠넘겨 온 부르주아 정부를 지독히 증오하고 있었다.

공화정은 서둘러 총선 실시를 선포해 항복 결정을 굳히려 했다. 급박한 일정 탓에 파리 좌파들은 선거 운동을 벌이기 어려웠고, 결국 왕정주의자들이 대거 당선했다. 마르크스가 “괴물 같은 난쟁이 도깨비”라고 부른 아돌프 티에르가 정부 수반이 됐다. 티에르는 1834년 공화주의 봉기를 진압한 전력이 있었다.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 한 유산 계급의 지배는 항상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7 1871년 3월 18일, 티에르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정규군을 보내 국민방위대가 보유한 대포 200문 등의 무기를 압수하라고 명령했다. 이 시도를 알아차린 여성 노동자 루이즈 미셸은 소총으로 무장한 여성 200여 명을 이끌고 언덕으로 달려왔다. 국민방위대는 물론이고, 여성과 아이들도 병사들을 에워싸고 항의했다. 병사들은 장군의 발포 명령을 세 차례나 거부했다. 티에르와 공화정 정부는 파리 밖으로 도망쳤고, 파리는 노동계급의 손에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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