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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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베이닌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는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을 “무엇보다도 안보 문제”로 간주했고 1954년부터 2009년까지 합법 파업은 존재하지 않았다. 63 이집트노총은 정권에 통합돼 있었다. 노조 관료들은 국가 기구의 일부였고, 국민민주당NDP은 방대한 지원망을 운용해 노조 관료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활동가이자 급진 언론인 하니 슈크랄라는 이집트노총을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는 소련 식의 낡은 공룡 조직이며 … 노동조합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의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묘사했다. 64 2011년 8월 이집트노총은 공식적으로 해체됐지만, 그 결정이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다. 군최고평의회는 노동운동을 통제할 목적으로 옛 질서의 노조 관료들이 이전처럼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많은 관료들이 자신의 지위와 특권을 그대로 유지했고, 독립노조 활동을 저지하는 데 필요한 자원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 이는 경영진·노조·보안경찰 사이의 구분이 자주 모호해지는 국영 부문에서 특히 중요하다. 이집트노총 관료들이 사내 복지 제도인 ‘사나디크 하스르’(“개인 상자”)를 통제한다는 것도 중요한데, 이 제도는 건강 악화, 결혼 등 지출이 많은 일에 돈을 지원해 줘서 대부분의 가정에 사활적이다. 반란과 뒤이은 대중 파업으로 흔들렸을지언정, 옛 노조들의 영향력은 여전하다. 마할라알쿠브라 직물 공장, 헬완 철강 공장처럼 역사적으로 투쟁의 중심이었던 일부 대규모 작업장에서 독립노조 활동가들이 이집트노총 산하 노조를 대체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슬람 “개혁주의”

이집트독립노조연맹 지도자들은 전국적 노조 구조를 새롭게 확립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 이는 당면한 핵심 문제가 작업장 내 행동을 강화하고 일반화하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두 배로 어려운 일이다. 노동계급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 정치 경향이 없는 데서 그들 역시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슈크랄라는 무바라크 탄압의 영향으로 “정치가 박멸됐고”, 노동운동 활동가를 비롯한 좌파 활동가들은 자그마한 서클과 지하 조직 수준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이후 노동운동이 부활했을 때조차 이전의 역사적 손실을 메우지 못했다. “독재 정권은 정치를 배척했고, 변화를 가져올지도 모를 사람들을 고립시켰다.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노동자 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 맺을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좌파 단체가 존재하지 않게 됐다.” 65 그러나 이는 단지 탄압의 결과만은 아니며,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는 정치 경향이 수십 년간 영향을 끼친 결과이기도 하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경향은 이슬람주의다.

무슬림형제단은 이집트 사회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왔는데, 특히 그들의 반식민주의 투쟁의 역사, 반제국주의적 언사, 복지 활동 덕분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의 뿌리는 19세기 말 반식민주의 운동과, 인도와 중동에서 정치 활동을 했던 이란인인 자말 알딘 알아프가니의 사상에 있다. 아프가니는 주로 이집트에서 활동했고, 1882년에 일어난 민족주의 운동인 우라비 항쟁과 연관을 맺고 있었다. 66 아프가니는 범이슬람 사상을 식민주의에 맞선 저항의 전략으로 정식화했는데, 이슬람 전통에 내재된 개념(신앙 공동체 ‘움마’ 내에서 무슬림들이 공유하는 정체성과 이해관계)이야말로 유럽 열강이 아시아·아프리카·중동을 식민지로 분할하면서 뿌려 놓은 민족·종파·언어·“인종” 간 차이를 해소할 열쇠라고 주장했다. 아프가니는 무슬림들이 당대 신앙인들의 조상 또는 선조인 ‘살라프’의 원칙과 관습, 그중에서도 특히 7세기 예언자 무함마드의 공동체에서 무슬림들이 행한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67 무함마드는 식민지의 존재에 적극 반대했고, (실패했지만) 오스만 제국 전역에서 저항을 조직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종교 전통을 정치 행동과 결합시킨 정치 조류인 이슬람주의는 1920년대 후반까지는 효과적인 운동으로 정착하지 못했지만, 이후 하산 알반나가 ‘알이크완 알무슬리민’(무슬림형제협회 또는 무슬림형제단)을 창립했다. 이 단체는 문화 협회로 시작했지만 곧 정치적 어젠다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무슬림형제단은 영국 점령에 맞서며 조직 체계를 갖췄고, 토지 개혁과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요구했으며, 영국과 시온주의 운동에 맞서 투쟁을 벌이던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투사들을 보냈다. 68 무슬림형제단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리처드 미첼에 따르면, 무슬림형제단은 창립 20년 만에 2000개의 지부, 50만 명의 회원, 그 비슷한 규모의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아랍 세계 최초로 진정한 대중 조직으로 발돋움했다. 69 무슬림형제단은 식민주의 반대 운동을 주도하면서 영국 제국, 말랑말랑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인 와프드당, 파루크 왕정 모두에 커다란 골칫거리가 됐다. 그러나 이 단체는 모순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영국과 정권에 대한 단호한 반대와 타협 사이에서 오락가락했고, 이집트 대중이 반식민지 투쟁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면서도 그 지도부는 권위주의적이고 매우 엘리트주의적이었으며, 노동자와 빈농을 비롯해 많은 소외된 사람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켰지만 중핵(과 지도부)은 비교적 부유한 상업 프티부르주아지 성원들이 장악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계급을 가로지르는 운동이었고, 군사적 점령의 현실, 식민지 경제의 왜곡된 성격, 세속적 민족주의의 실패, 팔레스타인 문제 등 때문에 성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이 국가 권력에 도전할 능력이 없었기에, 결국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이 1952년 7월 쿠데타를 일으킬 기회를 잡았다.

나세르는 무슬림형제단을 금지하고 활동가들을 탄압했다. 이후 40년 동안 무슬림형제단은 몇 가지 구별되는 국면들을 거쳤다. 나기브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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