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

필 마플릿 178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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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이슬람주의 — 마플릿]은 자신의 행동을 서양의 논쟁에서 허용 가능한 범위 안에 있다고 해명하는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이들은 명백히 인종차별주의적이고, 노골적으로 제국주의적이며, 뻔뻔하게도 비인간적이다….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이다. 우리가 “자유 세계”라고 불러야 마땅할 세계는 양자택일에 직면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이해할 수도 없을 정도로 사악한 세력에 맞서 굳건히 단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회유책에 지나지 않는 허황된 부인을 넙죽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거나. 42

데일리 같은 이들은 이슬람주의 단체와 정당들 일체에 대해 깊은 적개심을 표출하는 것이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오래 확립된 유럽의 이슬람·무슬림 편견 전통, 즉 수 세기에 걸친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 지배 문화에 기대고 있었다. 이것은 냉전 이후 “문명의 충돌” 운운하는 주장으로 재개되고 선명해졌다. “문명의 충돌”은 미국의 보수주의 전략가 새뮤얼 헌팅턴이 정식화한 것이지만, 그 기원은 이스라엘을 열렬히 신봉하는 영국계 미국인 학자 버나드 루이스의 저작이었다. 1990년에 루이스는 나치 사상과 공산주의가 20세기 중엽 이슬람 사상에 영향을 미친 사례를 제시하면서 ─ 현대사에서 점점 더 빈번해지는 ─ 위기 시기에 무슬림의 불만이 “폭발적인 분노와 증오의 혼합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43 이슬람 행동주의/이슬람주의에 파시즘의 특징적 요소들이 포함돼 있고 그래서 증오와 폭력을 분출하게 된다는 생각이 점점 더 광범하게 통용되고 있으며, 특히 유럽에서는 다문화주의를 거부하고 배타적 이주민 정책을 옹호하는 데에 동원되고 있다. 44

2008년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제3세계에서 새로운 저항의 물결이 일어나자, 그런 운동들을 매도하려는 더욱 체계적인 시도들이 있었다. 다국적 자본이 실패한 책임을 대신할 희생양을 찾는 자들이 그런 운동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시위, 파업, “폭동” 참가자들이 문화적 결함, 특히 이슬람의 영향을 받는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45 토니 젓은 네오콘과 “자유주의” 지식인 모두로부터 그런 반응을 예상했는데, 특히 자유주의자들이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 이라크 침공, 2006년 레바논 분쟁을 “새로운 세계적 대립에서의 국지전”으로 보는 데에 주목했다. 46 그런 전쟁들은 “그들의 조부모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전쟁, 그들의 부모가 냉전 때 국제 공산주의에 맞섰던 것에 견줘도 손색 없는 ‘선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또다시 이념적으로 분단된 듯한 세계에서 “자유주의 지식인들은 마침내 목적 의식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슬람 파시즘’과 전쟁 중이다.” 47

이집트 좌파들의 파시즘 개념도 많은 문제가 있었다. 1940년대 공산당원들은 종종 무슬림형제단과 함께 영국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무슬림형제단과 사이가 틀어지자 그들을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48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와 급진 민족주의자들인 자유장교단이 파루크 왕정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조직하자, 주요 공산주의 단체들은 처음에는 이 결단을 환영했다가 그 뒤에는 나세르와 그의 동료들을 “파시스트 독재 정부”라고 비난했고, 49 최종적으로 나세르 정권을 진보 세력이자 소련의 동맹이라고 했다. 1965년 이집트공산당ECP은 나세르 정권이 “단독으로 혁명의 과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당을 해산했고, 지도적 당원들은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연합ASU에서 요직을 맡았다. 50 이런 자기 청산은 엄청난 결과를 낳았는데, 이후 이집트에는 일관된 좌파가 존재하지 않게 됐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 애초에는 지하드주의 경향의 급진적 부위였던 ─ 이슬람주의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넓은 공간이 열리게 됐다. 1975년 공산당 잔존 세력들은 타감무(“집회”라는 뜻, 국민진보연합당)의 핵심을 이뤘다. 타감무는 무슬림형제단이 반합법半合法이었던 때에 사다트가 활동을 허용한 껍데기만 정당 같은 “연단” 또는 “설교단”(‘마나비르’) 중 하나였다.

1980년대 무슬림형제단이 대중 조직으로 성장하자, 타감무는 이슬람주의자들에 맞서 국가의 편을 들었다. 수많은 무슬림형제단 회원들과 지지자들이 수감돼 있는 상황에서, 공산당 잔존 세력은 정권과 타협해 정부에서 한 자리를 맡길 희망한 것이다(좌절됐지만 말이다). 이들 선임 공산당원들은 브라이스크가 “저강도 민주주의”라고 51 부른 체제에 존재하는 취약한 좌파였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장려하는 이 체제에서는 공식적으로 선거와 정치적 다원주의를 약속하면서도 체계적 억압이 함께 이뤄졌다. 52 무바라크가 몰락하자 타감무는 분열했는데, 다수파는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당들, 특히 억만장자 나기브 사위리스가 만든 자유이집트인당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의 주된 목적은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타감무의 지도자 리파트 알사이드는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와 이집트 국민을 이용해 먹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53 2012년 대선 결선 투표에서 타감무는 무르시를 반대해 군최고평의회가 내세운 후보 아흐메드 샤피크를 지지하면서, 이것이 이집트가 이슬람 국가가 되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54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1989년과 그 이후 러시아와 동유럽의 격변들로 인해 해체돼 세계적 규모에서는 더는 조직된 세력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이데올로기적 반감기半減期는 오래 유지되고 있다. 이집트에서 공산당 잔존 세력들은 “진보적” 부르주아지를 찾는 역사적 탐색을 지속하는 중이다.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에 퇴짜를 맞은 역사가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이집트에서 가장 부유하며 군부 엘리트들과 연계가 있는 기업가 가문과 협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무슬림형제단에 반대해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이슬람 혐오를 흉내내며 활동을 하는데, 유럽과 미국에서 “이슬람 파시즘” 운운하며 못마땅해 하는 자들은 대개 신자유주의의 열혈 신봉자며 세계 곳곳에서 자본이 드러낸 결함들을 그 희생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자들이다. 이집트 국내 정치로 오면, 타감무는 스탈린주의 좌파의 실패를 이슬람 활동가들 탓으로 돌린다. 이슬람주의를 중앙 무대로 불러들이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했던 타감무 지도자들이 이제는 무바라크 퇴진과 그 뒤 국가에 맞선 전투에서 핵심 구실을 하는 운동과 많은 활동가들을 악마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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