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이집트 혁명에 대한 개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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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체의 청년들 사이에서 지도부 반대파가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1년 3월 능동적 활동가들이 새로 창당한 나흐다(부흥)당에 대한 지지를 모으기 위해 온라인 운동을 시작했는데, 혁명의 요구에 맞는 경제 계획, 여성과 기독교도들의 권리 보장이 필요하다는 점이 강조됐다. 2011년 3월 그들은 대중 운동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주제로 젊은 회원들과 토론을 하는 대회를 조직했다. 몇 개월 동안 긴장이 고조된 뒤 청년 활동가 수백 명이 무슬림형제단을 탈퇴해 이집트물결당을 창당했다. 이집트물결당은 2011년 11월 기준 당원이 수천 명이라고 했는데, 이 당원들은 대중 운동과 더 급진적인 변화를 위해 헌신했다. 95 무슬림형제단의 최고 지도자 96 무함마드 바디에는 반대파에 격한 반응을 보이며 무슬림형제단 회원들은 새로 창당한 자유정의당FJP에만 가입하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슬림형제단에서 많은 사람들이 제명됐는데, 그중에는 무함마드 하비브, 압델 모네임 아부 엘포투(그 뒤 무슬림형제단 후보에 맞서려고 대선에 출마했다)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지도부 출신들도 있었다.

선거, 의회, 군최고평의회

로렌조 비디노는 이런 불화들이 무슬림형제단의 분열이 아니고, 붕괴는 더더욱 아니라고 주장한다. 97 이는 옳은 말이지만, [무바라크 퇴진 이후] 지속적 탄압이 가하는 규율 압박이 없어진 데다 대중 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무슬림형제단은 불안정해지고 있고 그 구성원들은 계급에 따라 점점 더 뚜렷하게 분화하고 있다. 평회원들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는 반면, 부르주아 엘리트들은 확고한 전략을 발전시키는 중이며, 그 전략이 지도부에 점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터키 식 모델을 따라 “이슬람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려는 전략이다.

터키의 정의개발당AKP은 2002년 첫 선거 승리를 거둔 이래 중동 전역의 이슬람주의자들에 큰 영향을 미쳐 왔다. 정의개발당은 이슬람 색채를 띤 신자유주의를 내세우면서 한편으로는 기업 자본과 세계 금융기관들의 요구를,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발리 나스르는 이렇게 논평한다.

최근 10년 사이 터키에서 자본주의적 성장이 크게 이뤄지고 정치적 다원주의가 확대된 것은 권위주의적 지도부의 자비나 오일 머니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 지역 전체에서 성장하고 있는 편협하고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신흥 중간계급에게 기업가적 에너지를 자극시킨 자유화와 자유 시장 개혁이 터키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98

외메르 타슈프나르는 최근 터키의 성장은 주로 정의개발당이 “기업가 무슬림 부르주아지”를 고무한 덕분이라고 시사한다. 99 정의개발당의 “역동적 실험”이 “아랍 세계에 중대한 교훈”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100 무슬림형제단의 핵심 인물들은 터키가 군부와 관료들이 통치하던 형태(이집트의 역대 정권들과 유사하다)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난 듯 보이는 데 매료됐고, 그래서 정의개발당을 따라가려 한다. 터키 언론에 따르면, 무슬림형제단은 정의개발당을 본떠 자유정의당을 만들었고, 정책은 물론 당명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101 2011년 4월에 결성된 자유정의당은 중동 전역, 특히 터키에서 동맹을 발전시켜 이집트 자본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2012년 자유정의당의 지도적 당원들은 이집트사업개발협회EBDA를 결성했는데, 이 협회의 출범식에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미국의 기업 경영진들이 참여했고, “무슬림형제단 기업인들의 데뷔 축하 파티”로 묘사됐다. 102 한센은 무슬림형제단의 엘리트 사업가들을 “1퍼센트의 형제들”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무바라크 시대에 소외됐던 기업인과 금융인들이며 이제 부에 걸맞는 권력을 얻길 바란다. 대개 갑부인 이들은 1980~1990년대 ‘인피타’ 시대에 이슬람 금융이 번창했을 때, 그리고 더 최근에는 터키와 무역을 늘리면서 성공을 거뒀다. 이들의 비공식적 지도자는 카이라트 알샤티르인데, 과거에 무슬림형제단 부대표를 맡다가 무바라크에 의해 투옥됐던 인물이다. 샤티르는 정권에 자산을 압류당했던 2007년에 최소 1300만 달러 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103

이것이 무슬림형제단이 군최고평의회와 협력하는 “밀월”에 들어선 배경이다. 장군들은 대중 운동을 통제하고 무슬림형제단의 권위를 제약할 수단을 찾았고,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집권을 위한 역사적 기회를 붙잡고자 자유정의당에 최상의 기회가 될 선거 협약을 맺고자 했다. 군최고평의회가 조기 선거에 동의한 것은, 다른 정치 경향들이 공식 정당과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상황에 견줘 무슬림형제단에 크게 유리했다. 그 대가로 무슬림형제단은 대중 행동을 단속하겠다고 합의해 줬다. 무슬림형제단 지도자들은 시위를 자제하라고 요구했고, 무슬림형제단 충성파들은 전투적 행동을 저지할 목적으로 시위에 참가했다. 그러나 “밀월”은 권력 투쟁이기도 했는데, 로버트 스프링보그는 이 기간에 역사적인 적수인 “코브라와 몽구스”가 서로 이익을 얻고자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다고 설명한다. 104 이 시기 무슬림형제단에 더 많은 문제를 안겨 준 것은 대중 운동의 활력이었다. 2011년 10월 카이로 중심부에서 기독교인들과 급진적 활동가들이 벌인 시위를 경찰이 야만적으로 공격하자 그 뒤 더 많은 시위가 벌어졌고 진압 부대가 시위 참가자 수십 명을 살해했다.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대중 운동 지지에 뜨뜻미지근했지만 회원들을 거리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총선에 주력하려 해도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1월과 12월 하원 선거에서 무슬림형제단은 40퍼센트를 득표했고, 자유정의당의 선거 전략이 명백히 승리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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