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사회주의

김인식 3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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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주의의 뿌리는 룩셈부르크가 생각한 것보다 독일 사민당 안에 더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기회주의 이론이 “우리 당에 들어온 프티부르주아적 요소가 우세하도록 하는 무의식적인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외부로부터의 감염과는 쉽게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개혁주의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베른슈타인은 개혁주의를 출판물로 표현한 잘못만 저질렀을 뿐이다. 이그나츠 아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를 마지막이자 최후의 진리의 배타적인 담지자로 여기며 우리 당에서 숙고하는 로자, 메링, 파르부스 때문에 조용해진 모든 사람들 중 누가 그들이 설파한 엄격한 전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단 한 명도 없다.”

개혁주의의 뿌리는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다. 첫째, 베른슈타인은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이었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들은 4000명에 이르는 독일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들이었다. 이는 개혁주의적 오염의 주된 원천이 사민당 조직 밖이 아니라 그 조직의 핵심부에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개혁주의 문제가 프티부르주아지나 노동조합 관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관료가 노동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위에 있게 된다.

그래서 독일 사민당의 타락 과정은 계속됐고, 사민당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독일 황제를 편들었던 1914년 8월 4일에 완전히 곪아 터졌다. 룩셈부르크도 이 문제를 인식했지만, 수정주의의 원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 주장에 이론적으로 도전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 주장에 맞서는 효과적인 수단을 제시할 수 없었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의 깊은 뿌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론적 공격과 대중 투쟁의 급진화 효과가 결합되면 개혁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룩셈부르크는 사민당이 아닌 다른 당을 건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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