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8호 2021년 3~4월호)

지난 호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사회주의

김인식 3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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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이 “필수불가결하지만” 자본가들의 모든 이윤을 점진적으로 장악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자본주의의 생존 과정 ― 구조조정·침체 등 ― 에 의해 노동조합이 계속 공격받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운동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묘사했다.

엥겔스의 표현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투쟁의 학교”이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가하는 자본가들의 압력을 완화시켜 주는 수단이다. 이 말은 두 집단의 대표자들이 벌이는 협상을 통해 영구적인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개혁주의 사상을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고,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신디컬리즘을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룩셈부르크는 정치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도 예지적인 주장을 했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 정당의 정확한 진로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미래를 옳게 전망했다. “만약 우리가 수정주의의 정치적 개념들을 따르면 우리는 수정주의의 경제 이론들을 추적했을 때 이르렀던 것과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개혁이 될 것이다.”

독일 사민당 안에서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룩셈부르크의 운동은 외관상 성공한 듯했지만 종국에는 패배했다. 1898년과 1899년, 특히 1901년에 베른슈타인의 이론들은 독일 사민당 당대회에서 철저하게 반박당했다.

카를 카우츠키도 처음에는 룩셈부르크를 편들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층이 가한 압력에 밀려 카우츠키는 점점 융통성 없고 희석된 “정설” 마르크스주의로 후퇴했다. 1910년에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지향성이 독일 사민당 내에서 주변화되도록 작업했다. 이 시기에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의 분열이 심화됐다. 마침내 1910년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노동자가 권력에 이르는 길을 놓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했다. 그 결과, 독일 사민당은 점차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받아들인 개혁주의자, 말로는 급진주의를 유지했지만 의회적 투쟁 방식에 한정한 카우츠키(“늪의 지도자”)가 이끄는 중간주의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진영 등 세 경향이 존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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