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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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

정체성 정치 ―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정진희 17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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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정치를 통해 대중적 결집이 이뤄진다 해도, 이런 결집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운동 참가자들의 계급적 배경이나 정치적 지향이 상이하므로, 운동이 성장하면 운동의 향방을 놓고 정치적 차이가 커지기 마련이다. 정체성 정치는 차별받는 사람들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적 차이를, 그에 따라 생길 수밖에 없는 운동의 목표와 전략 차이를 뛰어넘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에는 자율주의가 있다. 특정한 차별을 받는 사람들 자신이 그런 차별에 맞선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 차별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투쟁할 것을 강조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차별받는 당사자만이 투쟁을 잘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다. 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서 투쟁을 더 강력하게 만드는 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특정 정체성을 중심으로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특정 차별을 직접 겪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을 이해할 수 없기에 함께 싸울 수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 이런 생각은 차별에 맞선 투쟁이 노동계급의 계급투쟁과 무관하다고 여긴다. 또,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혁명적 좌파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담겨 있다. 

정체성 정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서구 학계를 지배한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들에 기반을 두었다. 이런 사상은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며 정치·경제·이데올로기 영역을 서로 별개의 것으로 본다. 현실의 파편성을 강조하며 국지적 저항만이 가능하다고 여긴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이 학계와 주류 언론들에 의해 널리 퍼졌다. 1989~1991년 동유럽과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 붕괴를 보며 혁명적 사회 변화의 전망을 잃어버린 활동가들이 개혁주의로 이동하면서 이런 지적인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았다. 혁명적 변화를 부정하면서 계급과 계급투쟁을 배격하는 분위기가 진보 진영에서 유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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