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지난 호

일반 논문

정체성 정치 ―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정진희 17 34
359 4 2
3/15
프린트하기 전체 보기 PDF 보기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기 위해 성소수자끼리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정체성 정치의 사례다. 여기서도 성소수자들만의 연대를 추구하며 이성애자의 운동 동참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있지만, 더 흔한 형태는 성소수자들의 연대를 핵심으로 보며 이성애자의 운동 동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취급하는 것이다.

20181006221029_0027_5026a8fe0e3309c77a8e.jpg
정체성 정치가 대중 시위에 사용된 사례
2018년 10월 불편한 용기 주최 5차 편파판결, 불법촬영 규탄시위 ⓒ이미진

이처럼 사회운동 내의 정체성 정치에도 여러 형태가 있다. 정체성 정치 옹호자들의 이데올로기적 색조에도 차이가 있다. 정체성 정치의 좌파적 버전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결합된다. 그보다 더 온건한 세력들의 정체성 정치는 자본주의를 문제삼지 않는다. 한국의 여성·성소수자 운동에서 지배적인 엔지오들은 자본주의 내에서 기성 권력자들에게 인정받으며 그 일부로 편입되는 전략을 추구한다.  

정체성 정치가 차별에 맞선 운동에서 늘 강력했던 것은 아니다. 정체성 정치는 미국에서 1970년대부터 득세하기 시작해 1980년대에 번성했다. 한국의 사회운동에서 정체성 정치가 널리 수용된 것은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부터다. 정체성 정치의 득세는 혁명적 좌파가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겪으면서 약화된 현실과 관련 있다.

1980년대 한국의 여성운동은 여성 해방을 전체 사회변혁의 일부로 보는 ‘변혁적 여성운동’이 지배적이었지만, 1990년대 초부터 여성운동의 주류는 국가를 타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협력할 대상으로 보면서 국가의 지원을 얻고자 하는 엔지오가 차지했다. 일상생활에서의 변화가 강조됐고 여성 정치인이나 여성 국가 관료 배출이 여성운동의 핵심 목표가 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한국의 동성애자 운동에서도 이내 정체성 정치가 득세했다.

정체성 정치의 강점과 약점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정체성 정치는 호소력이 있다. 그 강점은 공통된 분노와 정의감에 호소해 많은 사람들을 차별에 맞서는 운동에 동참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식으로 모인 사람들의 규모가 클수록 차별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단결해 있다는 느낌을 더 강하게 받는다. 그 운동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일수록 이런 느낌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젊은 여성이 참가자의 대부분을 차지한 불법촬영 항의 운동에서도 이런 정서가 두드러졌다. 이 운동의 주도자들은 기성 운동 단체들의 참가에 반대하며 ‘정치 배제’를 선언하는 아나키즘3 성향을 띠었는데, ‘정치’가 개입되면 운동이 분열하므로 ‘여성’을 강조해야 운동의 단결이 유지될 수 있다고 봤다.

닫기
x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