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4호 2020년 5 ~ 8월호)

지난 호

일반 논문

한국전쟁의 성격과 그 결과

김영익 11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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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군사력 증진에 필수적인 공업 생산 증대에 힘썼다. 정전협정상에는 신무기 도입이 금지돼 있었지만, 협정문 잉크가 마르기 전부터 남북 지배자들은 그런 조항부터 어기기 시작했다. 1953년 한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한에는 500명 규모의 미군 군사고문단이 있었다. 그러나 휴전 이후 수만 명의 주한미군이 상시 주둔했고, 심지어 미국의 핵무기도 배치됐다. 오늘날 한반도 핵 문제의 출발은 북한의 핵개발이 아니라 미군 핵무기 배치가 낳은 위협에서 시작됐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냉전의 최전선으로 남았다. 그리고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살해 사건 같은 숱한 전쟁 위기를 겪어야 했다. 남북 양쪽 지배자들은 상대방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끔찍하게 억압적인 착취 체제를 만들었다.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내부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 양쪽 지배자들 모두 강하게 탄압했다.

남한의 이승만은 지배 기반의 취약함 때문에 한국전쟁 발발 전에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독재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50년대 내내 공안기구와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됐다.

그러나 이후 반공과 경제 건설을 내세운 군부 독재가 수십 년 더 지속됐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이후 군부가 부상한 배경을 이렇게 지적했다.

1953년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와해되고 인적자원이 파편화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우뚝 솟은 것은 1950년에 10만에서 1953년에 이르러 60만 이상으로 팽창한 한국 군부였다. 군부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응집력이 강하며 가장 잘 조직된 기관이었으니, 머지않아 자신의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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