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3호 2020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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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논문

중국, 티베트, 좌파

찰리 호어 8 33
350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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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운동, 중국 정부의 막중한 요구, 군대 주둔 때문에 티베트 전역에서 생활 수준이 하락했다. 그런데 1966년 이후부터 시작된 문화혁명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20 문화혁명으로 티베트에서 티베트 문화가 전면적인 공격을 당했다. 대체로 중국을 지지하는 한 저자는 이렇게 썼다.

무자비한 파괴와 투쟁 때문에 손해가 막심했다. … 티베트인 수천 명이 살해됐다는 소문은 차치하더라도, 홍위병의 만행은 입증할 수 있는 것만 봐도 소름 끼쳤다.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자살로 내몰렸다. 티베트 옷을 입고 있거나 한족이 아닌 머리 스타일을 한 사람들은 거리에서 폭행을 당했다. 종교와 관련된 것은 모두 파괴하려는 시도가 행해졌다.21

1969년에 천년왕국 신봉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 18개 현을 포괄했지만 결국 중국인·티베트인 관료들이 자행한 대학살로 끝났다.22 인민‘해방’군이 이 반란을 진압했고, 반란 지도자들은 라싸에서 공개 처형을 당했다. 하지만 이는 티베트에서 중국이 실패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1976년에 마오쩌둥이 죽자 최고 지도자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실패한 경제 전략을 포기하고 “시장 사회주의”와 세계경제에 대한 문호 개방을 추진했다. 새로운 전략의 일환으로 개인의 자유를 상당 부분 허용했는데, 대중적 지지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티베트에서는 중국 정부가 대다수 티베트인들의 상황이 악화됐음을 인정하게 됐다. 덩샤오핑과 함께 최고 지도부에 있었던 후야오방은 급격한 정책 변화를 추진해, 티베트에 긴급 구조를 제공하고 사원寺院 폐쇄를 해제했으며, 티베트인 관료들의 지위를 빨리 높여 줬다. 1980~1985년에 티베트에 사는 중국인 중 거의 절반이 티베트를 떠났다.23

이런 부분적인 개혁으로도 티베트에서 생활 수준이 높아졌고, 티베트인들의 일상을 옥죄던 최악의 제약들이 사라졌다. 그러나 티베트인들은 더 많은 변화를 갈망했다. 1987년 9월 시위는 달라이 라마가 미국을 방문해 중국이 가장 난처하던 때에 벌어졌다. 이 시위 후에도 소규모 시위들이 이어졌다. 1987년 초 후야오방은 국가 경제 전략에 대한 자신의 주장 때문에 제거됐지만, 티베트인들은 후야오방 제거를 “[티베트] 자유화”에 대한 거부로 받아들였다.

1989년 초 판첸 라마가 죽으면서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지지한 핵심 지도자가 사라졌다. 1개월 뒤 중국공산당 티베트자치구 서기는 티베트 민족주의에 대한 유화적 태도 때문에 해임됐다. 판첸 라마의 장례 행렬이 경찰과 충돌했고, 1989년 3월 5일에는 중국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최소 10명이 사망했다. 뒤이어 벌어진 소요 사태는 1959년 이래 가장 거대한 저항으로 발전해 라싸의 중심부를 3일 동안 장악했다. 계속된 탄압으로 수백 명이 살해됐고, 수천 명이 감옥에 갔다.24 하지만 이 항의 시위는 1989년 5월 베이징에서 시작된 더 거대한 운동과 1989년 6월 4일에 벌어진 “톈안먼 광장” 학살에 묻혔다. 티베트는 텐안먼 광장 학살 이후 이어진 전국적 탄압에도 시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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