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8호 2018년 11~12월호)

지난 호

독일 혁명 100주년

1918년 11월 9일 독일 혁명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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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onny Gluckstein, ‘Remember, remember the 9th of November’, International Socialism No.160.

번역 이정구

1918년 11월 독일을 휩쓸었던 혁명이 일어난 지도 이제 한 세기가 됐다. 영국에서나 혁명이 벌어진 독일에서나 이 사건은 별 언급 없이 지나갈 성싶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이 사건은 곱씹어 볼 게 많은 20세기의 전환점이었다. 많은 핵심 교훈들 중에서 세 가지를 꼽으면 다음과 같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 소비에트 러시아의 운명, 그리고 노동자 평의회냐 의회 민주주의냐 하는 문제.

개혁이냐 혁명이냐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벌어지기 전까지 독일은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의 부인할 수 없는 중심이었다. 강력한 독일 사민당SPD은 본받아야 할 조직이었고,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었던 카를 카우츠키는 그 당의 주도적인 이론가였다. 또한 독일에서는 진보가 점진적 변화를 통해 성취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의 전복을 통해 성취될 것인가를 두고 매우 중요한 논쟁이 벌어졌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자신의 소책자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했던 1900년에 이 논쟁이 시작됐다.1

베른슈타인도 룩셈부르크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널리 알려진 견해는 카를 카우츠키가 가장 잘 표현했는데, 그는 이렇게 썼다. “독일 사민당은 혁명적 정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는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적들이 혁명을 막을 힘을 갖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혁명을 창조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혁명에 착수하거나 혁명의 길을 준비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2 이런 중간주의적 입장은 자본주의가 평화롭고 중단 없는 발전을 이루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사회 변혁이 저절로 벌어질 때까지 사회주의의 초기 세력들(사민당과 그 노동조합들)이 성장할 것이라고 가정한다. 심지어 카우츠키는 이 시나리오대로 사태가 전개될 것임을 입증하는 이론을 발전시키기까지 했다. 자본주의는 “군비 경쟁과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 단계에서 “그 다음 단계, 즉 초제국주의”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3 믿기 힘들겠지만 이런 주장을 담은 그의 글이 제1차세계대전이 벌어지기 한 달 전인 1914년 9월에 발표됐다.

뒤이어 벌어진 전쟁의 대규모 파괴가 전선에서는 대량 살육을 초래했다. 독일 국내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실상 기계에 묶여 육체적 한계에 이를 때까지 일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사민당 지도부는 전쟁이 벌어지면 이에 반대하는 대중파업을 조직하겠다는 약속을 내팽개치고 전쟁에 반대하는 세력을 모두 탄압하는 황제의 모든 조치들(끔찍한 계엄령 같은 것들)을 지지함으로써 경멸스런 역할을 수행했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지도 하에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가 의식적으로 시작하고 준비한 1917년 10월 봉기야말로 카우츠키의 주장들을 논박하는 것이었지만, 그 전에조차 러시아의 사태들은 독일에 영향을 미쳤다.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차르가 물러난 지 두 달 뒤에 독일 라이프치히의 노동자들이 배급 삭감에 항의하는 파업을 벌였고, 이내 자신들의 노동자 평의회를 세웠다. 뒤이어 베를린에서 노동자 20만 명이 일을 멈췄다. 체포가 불길을 잠재우는 듯했지만 1918년 1월에 다시 불이 붙었다. 물가 상승률이 400퍼센트인데다 참을 수 없는 노동 조건 때문에 베를린에서 숙련 기계공 대략 40만 명이 작업을 중단하고 414명으로 구성된 노동자 평의회(대의원 1명당 노동자 1000명을 대표)를 구성했다. 이들의 요구는 경제적 개선과 평화였다. 이번에는 경찰과 군대가 파업 노동자들의 결의를 분쇄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사민당 지도자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나라가 망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파업을 서둘러 종결시키려는 명확한 의도를 갖고 파업 지도부에 결합했다.”4 폭력은 실패했지만 그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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