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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Ⅱ: 오늘날 중동 위기와 제국주의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 잃어버린 기회의 역사


MARX21

  1. 이집트 최초의 근대적 정당이자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 와프드는 아랍어로 ‘대표단’을 의미하며 이집트의 독립을 요청할 목적으로 1918년 영국 제국을 방문한 대표단이 그 시초이다.
  2. 1947년 결성된 공산주의 조직. 이집트 출생의 유대인 앙리 퀴리엘(Henri Curiel)이 주도한 하디투는 산업 노동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으며 당시 이집트 내 공산주의 단체 중에서 최대 규모였다. 1952년 나세르의 쿠데타를 지지했으나 나세르 정권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내분을 겪으며 약화되다가 1955년에 다른 단체들과 함께 ‘통합공산당’을 창당했다.
  3. 1936년 급증하는 유대인의 이민, 이에 따른 아랍인 토지의 강탈, 실업률의 증가에 저항하며 시작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영국 식민 당국의 유혈 탄압으로 무장봉기로 진화했다. 3년 동안 지속된 전국적 봉기로 팔레스타인인 5000여 명이 사망하고 1만여 명이 부상당했다.
  4. 시온주의 국가(Zionist Entity)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아랍의 좌파와 민족주의자들이 ‘이스라엘’ 대신 사용하는 표현이다.
  5. 하디투가 중심이 돼 다른 공산주의 단체들과 1955년 창당한 ‘통합공산당’과 ‘이집트공산당’이 합당해 1957년 결성됐다. ‘통일공산당’은 합당 당시, 가말 압델 나세르의 정부를 옹호하며 공산주의자들과 노동계급, 그리고 민족부르주아지들의 단결을 주장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6. 1962년 나세르의 주도로 창당된 나세르주의 정당. 국유화와 토지 개혁 등이 당 강령의 골자였다. 이후 사다트의 친서방 노선 때문에 분열하다가 1978년에 해산했다.
  7. “1977년 빵 봉기”로 알려진 이 운동은 사다트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다. 사다트는 IMF 차관을 들여오는 대가로 국가보조금을 삭감했고, 식료품 가격이 50퍼센트 폭등했다. 이 때문에 주요 도시들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이 운동은 군대가 투입돼 79명이 사망하고 550명이 부상당하고서야 끝이 났다.
  8. 무함마드 리파아트 알사이드(Mohamed Refaat El-Saeed, 1932~2017)는 하디투의 주요 활동가였으며 알타감무의 사무총장이었다. 그는 무바라크 정권에 협력하는 방향을 선택했는데, 1990년 대선에서는 야권 세력 중 유일하게 선거를 보이콧하지 않았다. 무바라크 정권과의 협력은 무슬림형제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한 일인 것으로 풀이되는데, 이슬람주의에 대한 맹렬한 반대는 알사이드의 정치적 담론과 저작의 중심을 이뤘다.
  9. 나깁 마흐푸즈(Naguib Mahfouz, 1911~2006)는 1988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우리 동네 아이들(게벨라위의 아이들)》에서 종교를 모독을 했다는 이유로 이슬람주의자들로부터 암살 공격을 받아 죽을 뻔했다. 이 책은 2007년에야 이집트에서 정식 출간됐다.
  10. 키파야는 아랍어로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키파야 운동은 2004년 무바라크의 연임과 장기 집권에 반대해 벌어진 대중운동이다.
  11. 2013년 8월 무슬림형제단 지지자들은 엘시시의 쿠데타에 반대하며 카이로의 라바아 알아다위야 광장을 점거했다. 무르시의 복권을 요구하던 이들을 군인과 경찰이 유혈 진압하면서 약 2600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당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이 사건을 근래의 현대사에서 최악의 시위 진압 사건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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