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29호 2019년 1~4월호)

지난 호

조직자 <소셜리스트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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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이 글은 영국 IS(SWP[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신)의 내부회보 IS Internal Bulletin 1974년 4월호에 실린 토니 클리프의 글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소셜리스트 워커>는 IS의 기관지였으며, 현재 SWP의 기관지로 이어져 주간신문으로 발행되고 있다. 1966년에 1백50명 남짓했던 IS는 1968년에는 8백여 명으로 늘었다. 그리고 1970~74년의 산업투쟁 덕분에 이 글이 쓰일 당시에는 3천 명을 훌쩍 넘어섰다.

레닌은 사회주의 신문이 노동자들의 조직자라고 말했다. 그는 세 측면에서 이 문제를 살펴봤다. (1) 신문의 필자로서 노동자, (2) 신문의 판매자로서 노동자, (3) 기부자로서 노동자가 그것이다. 그러면, 이 세 측면에 비추어 <소셜리스트 워커>의 구실을 검토해 보자.

지난 몇 년 동안 노동자들의 기고가 늘었다는 점에서 <소셜리스트 워커>가 놀랄 만큼 발전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소셜리스트 워커>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영국 좌파 진영에서 단연 최고의 사회주의 신문이었다는 점도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아직까지도 노동자들이 쓴 글은 대체로 신문에서 작은 지면만 차지한다. 노동자들이 쓴 뛰어난 글이 ‘술잔을 기울이며’ 란(Under the Influence)에 이따금 실렸고, 그 밖의 몇몇 기사를 노동자들이 쓴 적도 있다. 물론 최근에 노동자들의 기고가 매우 중요해진 곳은 독자투고란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독자투고란은 괄목할 만하게 발전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1939년 5월 27일치 미국 <소셜리스트 어필>을 비판한 내용이 <소셜리스트 워커>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다. 물론 <소셜리스트 어필>보다야 <소셜리스트 워커>가 훨씬 낫지만 말이다. 트로츠키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실제로 여러 필자들이 신문의 기사를 분담하고 이들 각자는 매우 훌륭한 필자이지만, 집단으로 보면 이들은 노동자들이 <소셜리스트 어필> 지면에 침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필자들은 모두 노동자들을 위해서 말한다(그것도 아주 잘 말한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들의 화려한 글재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문은 판에 박힌 저널리즘에 어느 정도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런 신문은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노동자들이 어떻게 투쟁하고 경찰과 충돌하는지, 노동자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이것은 당의 혁명적 도구로서 신문이 피해야 할 매우 위험한 태도다. 과제는 숙련된 편집부가 힘을 합쳐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스스로 이야기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 [<소셜리스트 어필>이] 성공하려면 근본적이고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

IS 회원의 거의 절반이 육체노동자라는 사실이 신문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파업뿐 아니라 자녀와 자녀 교육을 비롯해 생활과 관련된 모든 일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다. 대체로 신문은 노동자의 일기여야 한다. 물론 노동자들은 글쓰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흔히 노동자들은 글보다 말이 백배 천배 더 나은데, 말로 할 때는 구체성·다양성·개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마르크스주의의 변함없는 핵심은 진리가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흔히 노동자들이 글을 쓸 때는 일정한 형식에 맞게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글이 생생함을 잃어 지루해지고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녹음기를 이용해, 말하는 느낌을 그대로 살리면서 이야기를 편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이런 시도는 우리 신문 기자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예컨대 폴 풋[Paul Foot: 클리프가 이 글을 쓸 당시 <소셜리스트 워커> 편집자 — 옮긴이]에게는 신문 한 면을 채울 노동자들의 글 대여섯 편을 편집하는 것보다 지면 전체를 자기 글로 채우는 일이 더 쉬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글을 더 많이 실으려면 십중팔구 기자들이 더 많아야 할 것이다. 각 부문에 있는 우리 조직자들이 제 구실을 해줘야 할 것이다. 모든 공장 지회는 소식·기사·독자 편지 등을 신문에 보내야 할 것이다.

1912년에 레닌의 <프라우다>는 당이 불법 상황이었고 노동계급의 수도 우리보다 훨씬 적었지만 한 해 동안 노동자들의 글을 무려 1만 1천 편이나 실었다. 볼셰비키의 기반이 우리보다 훨씬 더 탄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예컨대 우리가 매주 노동자들의 글을 50편씩 신문에 싣는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신문 편집부와 조직자들이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쓴 기사나 전해준 소식이 어떤 식으로든 신문에 반드시 실려야 한다는 결정이 확실하게 추진돼야 할 것이다(물론 이럴 때조차 예외는 있다). 영국에 기자를 3천 명 이상이나 거느릴 수 있는 부르주아 신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있다.

노동자들이 신문에 글을 쓰는 문제는 노동자들과 신문의 일체감 문제를 제기한다. 부르주아 저널리즘에서는 데스크에 있는 몇몇이 수많은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위계제적 생각이 지배한다. 노동자 신문에서는 “소비자”의 참여라는 문제가 핵심이다.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간극을 없애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그래서 작업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노동자 몇십 명의 직접적 관심사를 다룬 기사(노동자가 쓴)가 엄청나게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신문은 계급 속에 더 깊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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