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 개정판: ─ 노동계급의 혁명적 윤리를 옹호하다

양효영 170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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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사망 80년을 맞아, 그의 명저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 ― 마르크스주의와 윤리》 개정판이 나왔다.

트로츠키는 왜 윤리에 대해서 글을 썼을까? 트로츠키가 《우리의 윤리, 그들의 윤리》를 쓰던 시점은 1930년대 세계 곳곳에서 반동이 승리하면서 사기 저하와 환멸에 빠진 지식인들이 점차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후퇴하기 시작한 때였다.

1933년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고, 1938년에는 파시스트 장군인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한편, 노동계급과 좌파들은 소련에 기대를 걸었지만, 당시 소련의 권력자들은 1936년 이후 악명 높은 모스크바 재판을 벌이며 걸출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숙청했다.

과거에는 러시아 혁명을 옹호했던 지식인들(빅토르 세르주, 프랑스공산당 창립자 보리스 수바린 등)은 방향감을 잃고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 윤리 쟁점은 이런 후퇴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

이들은 특히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볼셰비키의 신념이 비윤리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 스탈린주의를 낳았다고 봤다. 혁명가들이 ‘극단’적이고 ‘도덕관념이 결여된’ 원칙을 지닌 탓에 반동을 ‘유발’하고 반동 세력에게 도덕적 명분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결론은 반동도 문제이지만 혁명 세력도 문제적이고, 스탈린주의나 볼셰비즘 그리고 트로츠키주의는 모두 윤리적 측면에서는 한통속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에도 흔하다. 그러나 같은 수단이더라도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행위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돈을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부도덕하지만, 총을 든 강도에 맞서다 벌어진 정당방위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즉,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맞다. 수단이 목적을 미리 구현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상주의 윤리는 비현실적이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 투사들은 일제의 철권 통치에서 해방되기 위해 무장 투쟁을 해야 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노동자들은 평화를 위해 파시스트에 맞서 총을 들어야 했다.

이런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상주의적 도덕주의자들은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서 자주 양비론을 취하며, 실제로는 혁명적 저항에 나선 노동계급을 무장해제시키는 데 일조한다.

트로츠키는 폭력과 속임수가 없는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혁명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폭력적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회 모순이 없는 사회라면 당연히 속임수와 폭력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회로 가는 다리를 놓으려면 혁명적 수단, 즉 폭력적 수단 말고는 방도가 없다. 혁명 자체가 계급사회의 산물이고 어쩔 수 없이 계급사회의 특징을 지닌다.”

윤리는 역사의 산물

트로츠키는 이런 도덕주의적 지식인들의 태도는 그들의 중간계급적 특성과 관련 있다고 지적했다.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갈등이 첨예해지면 그 사이에 끼인 중간계급은 방향감을 상실하고, 둘 모두를 혐오하게 된다. 이들은 ‘평화로운’ 시기에 향수를 느끼며 격변하는 상황에 분노하게 된다.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를 설파하지만, 이는 불변의 것도, 초계급적인 것도 아니다.

트로츠키는 “윤리가 사회 발전의 산물이고 변하지 않는 윤리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오늘날 영아 살해는 잔혹한 범죄로 여겨지지만, 원시 공산제 사회나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는 인구수를 통제하기 위한 합리적 방안이었다.

트로츠키는 모든 윤리는 계급 윤리일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계급을 초월한 “일반적” 윤리로 착각하는 것들은 사실 (노동계급에게 강요하는) 지배계급의 윤리다.

부르주아지는 추상적 윤리라는 연막 뒤에서 피지배계급을 기만한다. 도박은 비난받지만, 주식은 훌륭한 재테크가 된다. 도둑질은 잘못이라 하지만, 국가가 ‘부가가치세’라는 이름을 붙이면 정당화된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한다. “평상시에는 전쟁을 ‘혐오’하던 가장 ‘인도적’인 정부들도 전쟁이 벌어지면 자국 군대의 지상 과제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몰살하는 것이라고 선포한다.”

친사용자 언론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공정성 위반이라며 비난하지만, 자본가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에게서 이윤을 가로채 온 것은 불공정하다고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라는 개념은 계급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계급투쟁이 첨예해질수록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적 원칙’은 힘을 잃는다. 중간계급 지식인들은 이런 상황을 보며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고 한탄하겠지만,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부르주아지의 윤리에서 벗어나 노동계급이 자기 계급의 윤리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는 과정이다.

스페인 내전 상황에서 파시스트들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 바르셀로나 정부는 수 차례 의회 회의 날짜를 속였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까? 전두환의 탄압과 학살에 맞서 광주 시민들은 총격전을 불사했다. 이것이 비윤리적인가?

트로츠키는 “평화로운” 시기에도 “모든 파업은 내전의 온갖 요소를 맹아적 형태로 담고 있다”고 지적한다. 자본가들은 언론과 첩자를 동원해 노동자들의 사기를 꺾으려 애쓰고, 노동자들은 사측이 예측할 수 없게 전술을 비밀에 부친다. 양측은 상대에게 자신의 투쟁 결의와 물적 자원을 과장하려 애쓴다.

오늘날에도 노동조합 지도자들, 온건한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상식’에 기대 개혁을 성취하려 한다. ‘국가의 의무는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노동자도 국민이다’, ‘공정한 노력에 따른 공정한 임금’ 등. 물론 평화로운 시기에는 그저 상식 수준으로도 운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격변기에는 상식으로는 완전히 불충분하다.

“상식은 그저 자본주의가 경제위기에 빠지기만 해도 난관에 봉착한다. 혁명, 반혁명, 전쟁처럼 거대한 격변이 닥치면 상식은 완전히 쓸모 없음이 드러난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노동자도 국민이라는 말이 이익 분배를 요구하는 데 그럭저럭 도움이 됐을 지 몰라도, 경제가 심각한 위기이거나 그리스처럼 심지어 국가 파산으로 가면 ‘국민’이라는 상식은 고통 전가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데 해악이 된다.

목적과 수단의 변증법적 관계

그렇다면 목적과 수단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트로츠키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수단이 다 정당하다고 보진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는 목적에 올곧게 부합하는 수단만을 취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도록 격려하며, 투쟁 속에서 용기와 자기희생 정신을 발휘하도록 북돋는 수단, 오로지 그런 수단만이 허용되고 필수적이다. 바로 여기서 모든 수단이 허용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대중의 자신감을 떨어뜨리거나 수동화시키는 수단, 노동계급 내 여러 부문을 반목시키는 시도는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아무리 그 의도가 선할지라도 개인적 테러나 지도자 숭배를 노동계급의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다.

또한, 거짓 비방으로 경쟁 좌파나 인물을 고립시키려는 시도도 비윤리적이다. 최근 영국 노동당 우파가 제러미 코빈 등 당내 좌파를 ‘유대인 혐오’라는 말도 안 되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공격한 것은 (목적과 수단 모두에서) 부도덕한 짓이었다.

한국의 노동운동 안에도 진정 중요한 정치적 차이를 두고 공개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 좌파를 거짓 비방하거나 이를 이유로 연대를 단절하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의 토론과 사상 발전을 오히려 가로막고, 진실을 외면하며 적당히 침묵하고 타협하는 분위기만 조성한다.

사실 절대적 윤리를 설파하며 트로츠키를 비난한 지식인들은 거짓과 날조로 가득찬 스탈린의 모스크바 재판에 대해서는 대체로 침묵했다. 각국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노동조합 관료들도 트로츠키에게 등을 돌렸다. 단적인 예로, 트로츠키가 날조된 혐의로 모스크바 재판에 기소됐을 때, 그의 망명지였던 노르웨이의 사민당 정부는 트로츠키가 공개적으로 기소에 대해 반박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들이 모스크바 재판의 기소 내용들을 정말 믿었을까? “우둔한 자들은 그랬겠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굳이 진실을 밝혀 근심거리를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소련 대사들처럼 비위를 맞춰 주고 편하고 씀씀이도 후한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는 게 현명한 일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트로츠키)

오늘날에도 거짓 비방은 그것을 진실로 믿어서가 아니라 기회주의적 이해타산에 따라 이용되고 있다. 이는 노동운동을 타락하게 만들 뿐이다.

한편, 미국의 저명한 철학자 존 듀이는 모스크바 재판이 조작극임을 밝히고 트로츠키를 방어했다는 점에서 훨씬 나았다.

실용주의 윤리를 지지한 듀이는 어떤 행위의 가치는 오직 그 실제 결과로만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듀이도 착취를 비판했다. 그 결과가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 저하, 고통 등처럼 나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듀이처럼 결과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원인에 대해서 덜 주목하게 된다. 착취의 원인인 계급 관계, 자본 간 경쟁이라는 원인을 분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원인이 모호하면 착취 비판도 그저 추상적 훈계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듀이는 착취를 없애는 방법은 혁명 밖에 없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에 반대한다. 듀이는 착취는 나쁜 것이고 없어져야 한다고 봤지만, 그는 착취가 없는 사회를 위해 계급투쟁뿐 아니라 계급 조화 등과 같은 수단도 필요하다고 봤다. 즉, 듀이에게는 목적과 수단이 서로 연결돼 있지 않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계급 조화라는 수단이 모두 공평무사하게 의미 있을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다른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트로츠키는 윤리의 문제는 결국 혁명적 전략, 전술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지적한다. 역사유물론에 근거해 노동계급이 인류 해방에서 할 역사적 구실을 이해해야 우리는 제대로 된 윤리적 방향타를 잡을 수 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 윤리를 이론으로 아는 것만으로 불충분하다. 이론은 늘 생생한 경험으로 뒷받침되고, 개선돼야 한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말한다. “눈을 크게 뜨고 강력한 의지로 이 운동[혁명]의 일부가 되는 것, 오직 이것만이 생각하는 존재에게 최고의 윤리적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오늘날 사회 변화를 위한 진정으로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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