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논문

한국전쟁의 성격과 그 결과

김영익 113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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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지났다. 이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고 그 유산이 우리의 어깨를 지금도 내리누르고 있다. 한국전쟁은 오늘날에도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그만큼 그 전쟁의 성격은 여전히 첨예한 쟁점인 것이다.

남한 우파들은 이 전쟁을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름은 소련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이 1950년 6월 25일에 먼저 공격했다는 데 초점을 맞춘 명칭이다. 북한의 기습 남침을 강조함으로써, 한국 지배자들은 당시 남한군과 유엔군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면 해당 전쟁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취할 수 없다. 예컨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참전국들은 모두 상대방의 ‘도발’에 맞서 자신들은 방어적 전쟁을 하는 것뿐이라고 강변했지만, 그 전쟁은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

후술하겠지만, 당시 남한 이승만 정부도 북한 못지않게 호전적이었고 북침을 열망했다. 당시 남·북한 정부 모두 상대방이 먼저 준비되기 전에 전쟁을 하고 싶어 안달 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우파들이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민주당도 일정 공유한다. 노무현과 문재인 모두 대통령 당선 후 첫 방미 때마다 한국전쟁에 관해 언급했다. 2003년 노무현은 ‘미국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아오지 탄광에 끌려 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7년 대통령 문재인도 미국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 철수 때 훌륭한 [미국] 선원들이 없었다면 나의 부모님이 거제도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한미동맹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로 맺어진” 약속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을 바라보는 남한 지배자들의 시각은 오늘날 제국주의 세계 체제 속에서 나름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해관계와도 연결돼 있다.

반면 북한은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고, 주요 참전국이었던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즉,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한 민족해방전쟁이라고(북한), 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한 전쟁(중국)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얘기하자면, 한국전쟁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한 전쟁도 아니라 냉전 경쟁의 주역인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서로 힘을 겨룬 전쟁이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신비화된 면을 걷어내고 보면, 냉전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즉, 제국주의 국가들)이 패권을 놓고 경쟁한 제국주의적 경쟁이었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는 동·서 양 제국주의 진영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곳의 하나였다. 그리고 양측의 경쟁은 매우 빠르게 가열돼, 마침내 1950년 한반도에서 충돌했다.

전쟁의 기원

1945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과 소련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했다. 당시 좌파들은 제2차세계대전을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이라고 봤고, 그래서 미군과 소련군을 모두 해방군으로 여겼다.

그러나 당시 미국과 소련은 식민지 민중의 해방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 두 제국주의 강대국의 전후 점령 정책은 자신들 간의 세력권 재분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 종결 전부터 유럽과 아시아 등지를 분할하는 세력권 조정 협상에 돌입했고, 합의가 어려운 곳은 재빨리 자국 군대를 보내 깃발 꽂기에 몰두했다.

미국과 소련 모두 점령지에 자신들의 체제를 이식하고, 자국한테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 모두 점령지에서 ‘아래로부터 혁명’ 움직임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1945년 9월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서 한 첫 일은 건국준비위원회(인민공화국)을 무시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옛 식민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한 것이었다. 미군정은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했던 경찰, 관료들을 거의 모두 제자리로 복귀시켰다.

미군정은 노동자와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을 적대하며, 옛 친일 인사, 친미·반공주의자들을 현지 지배 파트너로 택했다. 그리고 인민위원회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을 탄압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도 아래로부터의 자생적 움직임을 경계하고 억눌렀다. 자위대 등의 무장조직은 해산됐고 무력은 소련군과 보안대로 집중됐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의 지시로 세력이 재편되는 등 자치 권력의 성격을 금세 상실했다.

1946년 들어 소련의 지원 속에 북한에서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개혁’이 진행돼 토지가 분배되고 주요 산업이 국유화됐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국가와 생산수단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땅을 받았지만, 무거운 현물세 부담도 함께 받았다.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 조처는 국가 주도의 급속한 자본축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창출해 주는 일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한반도 분단만은 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미 전 세계에서 냉전 경쟁은 본격화되고 있었다. 한반도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인 소련 봉쇄 정책을 선언했다. 곧 미국은 마셜플랜을 발표했다. 마셜플랜은 유럽의 경제 재건을 지원해 유럽을 미국식 자유시장 자본주의로 통합하고 소련의 영향력을 잠식하려고 고안된 계획이었다. 이에 대응해 소련도 동유럽을 자국 경제와 묶는 블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1948년 한반도 남북에서 공식적으로 두 정권이 수립됐다. 그러나 남한에서 세워진 국가는 자유와 민주주의와는 아무 상관 없는 끔찍한 경찰국가였다.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남과 북 두 체제의 권력 형태는 달랐지만, 두 체제는 모두 노동자를 착취해 경쟁적으로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체제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상대방의 힘을 가늠해 보며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1948~1949년에 베를린 위기가 벌어졌다. 미국과 소련이 독일 문제 처리를 놓고 대립하며 긴장이 쌓였고, 마침내 소련이 미국·영국 등이 장악한 서베를린을 봉쇄해 버렸다. 미국이 핵무기 동원을 잠시 고려했을 만큼 한때 위기는 심각했다.

1949년 소련은 핵실험에 성공한다. 그리고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을 대륙에서 밀어내 버렸다. 그러자 미국은 훨씬 공세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50년 트루먼 정부는 군사비를 3배로 올리는 내용이 포함된 정책 문서인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 제68호’(통칭 NSC-68)를 내놓았고, 핵무장에서 우위를 유지하려고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했다(1952년 첫 수폭 실험).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도 서둘렀다.

 

이렇게 냉전 제국주의 경쟁의 격화라는 맥락 속에서 한반도에서는 열전이 벌어질 여지가 커지고 있었다.

전쟁의 전개

1948년 분단 정부 수립 이후 남북의 정권들은 모두 상대방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상대방과 오랫동안 공존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국토완정完整론’이 대두됐다. 1949년 1월 신년사에서 당시 북한 수상 김일성은 국토 완정과 조국 통일을 위해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국방장관 신성모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지껄였던 것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내심을 잘 보여 줬다. 한국전쟁 발발 전에 양측은 38선에서 수시로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49년 가을 중국에서 중국공산당이 국토를 통일하고 정부를 수립한 일은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관료들을 크게 고무시킨 사건이었다. 이들은 중국혁명의 성공을 한반도에서도 재현하기를 열망했다. 김일성은 소련 대사 슈티코프에게 “중국혁명이 성공한 이상 더 이상 해방전쟁을 연기할 수 없다” 하고 말했다.

게다가 앞서 1949년 5월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북한에 전쟁을 위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었다. 다만 중국 통일 후 국제 정세가 유리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그래서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관료들에게 중국공산당의 최종 승리는 국토 완정을 해낼 절호의 기회로 보였고, 이에 대한 중국·소련의 지원을 적극 요청하게 됐다.

공개된 옛 소련 비밀문서들을 보면 1949년까지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북한 정부의 전쟁 지원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소련이 전쟁에 휘말려 자칫 미국과 싸우게 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의 냉전 격화 속에 1950년 초 스탈린은 동아시아에서 더 공세적인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그는 일본 공산당을 향해 ‘평화 혁명’ 노선을 버리고 미국에 맞서 과감하게 투쟁하라고 촉구했다. 같은 맥락에서 한반도 전쟁에 대한 생각도 바뀐 듯하다.

스탈린은 중국도 의식했다. 이제 중국은 동구 진영 내에서 소련 제국주의의 잠재적 경쟁자였다. 스탈린의 전기를 쓴 아이작 도이처는 스탈린이 마오쩌둥에 대한 “잠재적 경쟁관계의 관점에서 행동했을 것이다” 하고 지적했다. 스탈린은 중국을 의식하고 자국의 제국주의적 위신을 생각해 한국전쟁 개전에 동의했을 것이다.

당시 스탈린은 소련의 핵무기 개발 성공으로 미국의 핵 보복이 어려워졌고, 소련이 미국과 직접 충돌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에서 미국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다고 본 듯하다. 이후 소련은 전쟁 개시에 동의했다. 물론 이 와중에도 스탈린은 소련의 개입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했다.

중국도 내전에 참전한 중국군 소속 조선인 병사들을 북한으로 보내 주는 등의 지원을 했다. 대륙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대규모 군대가 충원되면서,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 주력의 상당수가 이들로 채워졌다.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에는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남한군은 일방으로 패주했다. 이승만은 북한군의 서울 점령 전에 몰래 도주했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을 포기할 수 없었고, 개전 직후 바로 참전을 결정했다. 남한 국가는 미국의 지원으로 세워진 국가였고, 남한은 일본 방어의 전초 기지였다. 미국이 남한을 상실한다면 일본의 안전이 위협받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위신이 떨어질 터였다. 미국 트루먼 정부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사태를 관망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8월 무렵 전선은 낙동강 부근에서 고착된 채 치열한 참호전 양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이 무렵에 북한군 주력은 미군 폭격 등으로 대부분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고, 미국의 지원으로 남한군은 빠르게 재건돼 미군과 남한군을 다 합쳐 북한군보다 훨씬 더 많아졌다.

그러다가 9월 15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당시 북한군 주력은 궤멸 직전 상태로 몰렸다. 압록강 부근까지 미군과 남한군이 밀고 올라가자, 10월 맥아더는 11월 하순이면 북한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끝날 것이며 미군 장병들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고향에서 보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전쟁 양상은 이때 또 바뀌게 됐다. 10월 중국이 참전을 한 것이다. 10월 25일 중국군은 미군과 첫 전투를 벌였다. 소련도 비밀리에 미그기와 대공포를 동원해 한반도 북부에서 미군 군용기를 공격했다. 북한과 중국 모두 하늘에서 미군을 상대할 만한 전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반도는 미국, 중국 등의 제국주의 군대들이 직접 맞붙는 전장이 됐다.

중국 지배자들이 참전을 결정한 것은 소위 ‘사회주의 형제애’나 중국 혁명을 지원한 북한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었다. 중국도 나름의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바탕을 두고 참전했다. 중국은 미군의 한반도 북부 장악이 중국을 위협한다고 여겼다. 대만의 국민당 장제스 군대, 베트남의 프랑스군, 압록강의 미군으로 세 방향에서 압박을 받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면서 지정학적 경쟁에서 나름의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마오쩌둥은 군대를 보내 티베트를 침공했다.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이번에는 미군과 남한군이 밀려 서울을 다시 내줬다(1·4 후퇴). 그러다가 전열을 정비한 미군과 남한군이 다시 공세를 펼쳐 1951년 5월 무렵에 마침내 전선은 38선 인근에 고착됐다.

이처럼 전쟁이 전 국토를 수 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한국전쟁은 인명 살상 면에서 매우 잔인한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는 후퇴하는 와중에도 정치범들과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10만 명에서 많으면 30만 명이 이 학살로 희생됐다고 여겨진다. 그다음에 서울 탈환 후 돌아온 이승만 정부는 이른바 부역자 처벌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또 죽이고 탄압했다. 학살은 남한군과 미군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이어졌다.

미군은 전쟁 내내 제공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북한군이 점령한 남한 지역의 도시와 농촌을 향해 일상적으로 폭격 작전을 수행했다.

심지어 중국군 투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맥아더는 진지하게 핵무기 투하를 제안했다. 만주와 한반도 국경 일대를 오랫동안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방사능 지대로 만들어 버리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맥아더만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한 것은 아니었다. 트루먼 정부는 핵무기를 동아시아 쪽으로 옮겼고, 핵폭격 훈련도 진행했다. 1951년 초에는 실제로 사용할 뻔했다. 미군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1953년 정전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핵무기 실전 사용은 없었으나, 미군은 폭격으로 북한 지역을 말 그대로 초토화했다. 태평양 전쟁 때 투하된 폭탄의 총량이 50만 3000톤이었는데 한국에는 63만 5000톤이 투하됐다. 여기에 3만 2000톤 이상의 네이팜탄이 더해져야 한다. 예컨대 11월8일 B-29 70대가 신의주에 550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해 도시를 불태워 버렸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퍼센트 수준으로 파괴됐는데, 한국전쟁 때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퍼센트까지로” 추산됐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 도시는 최소한 50퍼센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951년 정전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양쪽 모두 전쟁을 쉽게 끝낼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이익을 키우고 ‘명예롭게’ 전쟁을 끝낼 방법을 찾으며 전쟁을 계속했다. 미군 합동참모본부가 1951년 7월에 극동군 사령관에게 보낸 훈령을 보면, “남한 정부의 통제권을 행정과 군사 모든 면에서 38선에 구애받지 않고 최대한 북쪽으로 확대한다”, “북한의 침략이 재개되지 않도록 한국군을 충분히 강화시킨다.” 즉, 이때부터 미국의 목표는 정전협상을 통해서 전쟁을 끝내되, 적에게는 최대한의 타격을 주고 남한군의 전력을 최대한 강화하면서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중국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소련의 스탈린은 매우 냉혹한 계산을 했다. 그는 정전협상 진행을 지지하면서도 북한이 잃는 것은 인명뿐이라면서 협상과 동시에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최대한 힘을 소진하기를 원했다. 그 틈에 소련은 미국과 경쟁할 역량을 키울 수 있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래서 2년여 동안 판문점에서 양측 협상자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와중에 전선에서는 양측 병사들이 고지전에 계속 투입됐다. 제1차세계대전의 참호전처럼 단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하게 희생됐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됐다. 어느 쪽도 전쟁으로 더는 얻을 게 없다는 게 확인되고 나서야 비로소 전쟁이 끝났다. 그러나 전쟁으로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이 희생됐고 1000만 명이 가족과 헤어졌고 500만 명이 난민이 됐다.

전쟁 이후: 냉전의 격화

한국전쟁은 무익하고 야만적인 전쟁으로 냉전의 집약판이었다. 즉, 경쟁하는 제국주의 열강 간 전쟁이었다.

그래서 단순히 한반도에만 국한될 수 없는 전쟁이었다. 일례로 전쟁 발발 직후 미국 트루먼 정부가 취한 주요 조처의 하나가 미군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보내 중국을 견제한 일이었다.

결국 한국전쟁은 냉전 제국주의 경쟁의 산물이자, 동시에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 경쟁이 격화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에게 한국전쟁은 “발발하여 우리[미국]을 구한” 위기였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군비를 대폭 증가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트루먼 정부가 작성한 ‘NSC-68’ 계획을 실현할 절호의 기회가 됐고, 미국 국방 재정은 1950년의 140억 달러에서 1953년 500억 달러 이상으로 폭증했다. 미국 국민총생산에서 국방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5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상승했다.

미국의 이런 국방비 지출 증대는 제국주의 경쟁국인 소련을 의식한 조처이자, 동시에 군사적 케인스주의의 발상이기도 했다. 미국 지배자들은 군비 지출 증대가 경기를 부양하는 효과가 있음을 제2차세계대전을 통해 경험적으로 체득했다.

NSC-68은 이른바 ‘공산주의의 세계 지배 공세’를 군사적 우위를 통해 분쇄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려면 미국은 서구 국가들을 묶은 효과적인 군사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2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서독이 재무장 기회를 잡게 됐다. 미국이 보기에 서독은 소련에 맞선 유럽 방위의 전초기지였다. 한국전쟁은 유럽 각국의 ‘독일 공포증’을 누르고 서독 재무장이 정당화되는 근거가 됐다. 서독 재무장은 1955년 서독의 나토 가입으로 귀결됐다.

미국과 서유럽의 군사기구인 나토에 맞서 소련은 동유럽에서 군비 증강 노력을 기울였고 바르샤바조약기구를 결성하게 됐다.

무엇보다, 한국전쟁은 일본이 재무장하고 경제가 부흥하는 계기가 됐다. 1949년 중국혁명으로 중국을 상실하자, 미국에게 자국의 패권을 지키는 데서 일본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신속하게 개입한 남한을 잃게 되면 바로 일본이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면서 경제가 회복됐다. 일본이 한국전쟁의 후방 보급 기지 구실을 하게 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가 한국전쟁은 “신이 내린 선물”이며 “이제 일본은 살았다” 하고 말할 정도였다.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50년 7월 8일 맥아더는 서한(맥아더 서한)으로 일본에서 7만 5000명의 국립경찰예비대 창설과 해상보안청 정원을 8000명 증원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이 일본 자위대의 기초를 이뤘다.

한국전쟁 와중에 미국은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는다. 그게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그러나 이 조약에는 중국, 한국 등 일본 침략의 피해국들이 배제된 채 일본의 주권을 회복시켜 미일동맹을 안착시키기 위해 서둘러 추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됐다. 평화헌법으로 군대 보유 및 교전권이 없는 일본이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면서 미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이를 지원하는 근거가 마련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사 문제(위안부와 강제징용 문제 등)의 진정한 해결은 무시됐다. 지금도 한일 관계에 큰 영향을 주는 과거사 문제의 시작이고, 그 시작부터 미국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이 밖에도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국의 패권을 지킬 동맹들을 지원하고 새로운 동맹 체제를 구축한다. 미일안보조약 외에도, 1951년 미국·호주·뉴질랜드의 군사 동맹 조약인 태평양안전보장 조약과 필리핀과의 상호방위조약,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1954년 대만과의 상호방위조약 체결이 이어졌다. 이때 미국의 지원 속에 아시아 각국에서 독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굳히게 됐다.

냉전의 최전선이 된 한반도

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 엄청난 인명 피해, 물적 피해를 낳았다. 남한은 물론이고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953년 휴전이 됐을 때 북한은 3년간의 폭격으로 황폐해져 현대적인 건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군은 도시에서 폭격 목표물을 찾기 힘들자 농사를 지으려고 쌓은 저수지 둑을 폭격해 파괴해 버리기도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북의 대치와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전쟁 경험 때문에 양측은 더욱 신경질적으로 서로 의식했다. 지배자들의 공식 이데올로기에도 전쟁 경험이 깊이 각인됐다.

휴전선을 기준으로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키웠고, 군사력 증진에 필수적인 공업 생산 증대에 힘썼다. 정전협정상에는 신무기 도입이 금지돼 있었지만, 협정문 잉크가 마르기 전부터 남북 지배자들은 그런 조항부터 어기기 시작했다. 1953년 한국과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남한에는 500명 규모의 미군 군사고문단이 있었다. 그러나 휴전 이후 수만 명의 주한미군이 상시 주둔했고, 심지어 미국의 핵무기도 배치됐다. 오늘날 한반도 핵 문제의 출발은 북한의 핵개발이 아니라 미군 핵무기 배치가 낳은 위협에서 시작됐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냉전의 최전선으로 남았다. 그리고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 살해 사건 같은 숱한 전쟁 위기를 겪어야 했다. 남북 양쪽 지배자들은 상대방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끔찍하게 억압적인 착취 체제를 만들었다.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내부의 정치적 반대자들에 대해서 양쪽 지배자들 모두 강하게 탄압했다.

남한의 이승만은 지배 기반의 취약함 때문에 한국전쟁 발발 전에 정치적 위기를 겪고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독재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1950년대 내내 공안기구와 미국의 지원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1960년 4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은 붕괴됐다.

그러나 이후 반공과 경제 건설을 내세운 군부 독재가 수십 년 더 지속됐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 이후 군부가 부상한 배경을 이렇게 지적했다.

1953년 이후 한국사회의 모든 조직들이 와해되고 인적자원이 파편화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우뚝 솟은 것은 1950년에 10만에서 1953년에 이르러 60만 이상으로 팽창한 한국 군부였다. 군부는 이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응집력이 강하며 가장 잘 조직된 기관이었으니, 머지않아 자신의 정치적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일부 소장 장교들은 한국 사회의 낙후한 현실에 답답해 하며 자신들의 주도로 자립적인 자본주의 발전을 해내기를 바랐다. 그래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장교 집단이 1961년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해 이전의 4월 혁명을 부정하고 국가 주도의 개발 체제를 확립하게 됐다.

이 기간 국가가 주도해 세계 자본주의에 깊숙이 편입되는 방식의 급속한 자본축적이 이루어졌다(소위 ‘한강의 기적’). 한국이 자율적인 자본축적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한국전쟁이 준 영향이 컸다. 1949년부터 진행된 농지개혁과 전쟁을 거쳐 지주 계급이 해체되면서 자본주의적 발전에 족쇄가 될 만한 사회적 관계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분단과 전쟁으로 노동자 운동과 저항 세력이 파괴됐다. 해방 직후 강력했던 한국의 노동자·농민 운동과 좌파 세력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물리적 탄압으로 기반이 점차 파괴됐고, 한국전쟁을 계기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다음으로 강력해진 국가가 있다. 전쟁은 국가기구들이 강력해지는 계기였다. 국가 관료들은 미약한 사적 자본들을 대신해 자본축적 과정을 진두 지휘했다. 국가가 세계시장을 뚫을 만한 몇 가지 주력 분야를 택해 거기에 자원을 집중하고, 기업들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게 지휘하고 감독했다.

미국의 지원 효과도 컸다. 냉전 하에서 한국이 대소 전초기지 구실을 하려면 자체의 방위력과 이를 뒷받침할 경제 건설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국이 수출 주도 정책으로 성공하는 데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국이라는 지위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미국의 후한 조처 덕분에 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에 견줘 외자를 쉽게 끌어올 수 있었고, 세계 최대 시장에 용이하게 진출하고 수출을 급격히 늘릴 수 있었다. 미국의 촉구 속에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일본한테 받은 자금, 미국을 지원하고자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면서 누린 베트남전 특수도 당시 한국 경제에 가뭄의 단비 같은 구실을 했다.

‘한강의 기적’은 노동자들을 비롯해 대중의 희생에 바탕을 둔 성공이었다. 그러나 경제성장 과정에서 대규모로 창출된 노동계급은 이내 독재 정권과 기업주들이 강요하는 조건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군부 독재를 끝장내는 주요 대중 저항에서 노동자들은 중요한 참여자들이었다.

한국전쟁 이후의 북한

북한에서 김일성도 한국전쟁 직후 급속한 공업화 노선을 취했다. 전쟁 이후 강화된 군사 경쟁의 압력에 대처하려면 무엇보다 한시 바삐 중공업 기반을 회복하고 성장시켜야 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주민들이 겪은 미군 폭격과 파괴의 경험은 이런 노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는 데 기여했다.

김일성은 축적을 위해서라면 무자비하게 농업과 인민의 소비를 희생시키고, 중공업에 모든 물자를 쏟아붓고, 강력한 노동규율을 강요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끊임없는 희생과 동원을 요구했다. 이에 대한 불만이 제기될 듯하면 박헌영 처형과 같은 공포 정치로 대처했다.

노동자·농민의 희생이 컸다. 북한 관료들은 어떻게든 노동자에게 가는 몫을 줄여서 축적의 재원을 확보하려고 했다. 경제의 고속 성장 와중에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그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성장하거나 정체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관료들은 매우 엄격한 노동관계법과 공장 규율로 노동자들을 다스렸다. 전시 노동규율이 전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농민들의 처지도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은 농업 잉여를 전쟁 전보다 더 많이 끌어와 공업에 투자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휴전 후 김일성은 급속한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농업 집단화로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가 노동계급의 일원이 됐고, 국가가 곡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도시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국가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결성할 권리가 박탈당해 있었기에,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했다. 예컨대, 더 나은 조건을 찾아 잦은 이직을 하는 것이 그런 저항의 사례다. 경공업의 경우 1953년 전체 종업원 수가 100이라고 한다면, 직장에서 이동한 수는 107퍼센트가 넘었다고 한다. 이런 높은 이직률은 흥미롭게도 1970~1980년대 군사 독재하 남한 노동시장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희생 강요는 때때로 큰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예컨대 황해남도 배천 지역을 중심으로 농업 집단화에 반발하는 일이 있었다. 이른바 ‘배천 바람’이었다. 1957년 북한 당국은 이런 움직임을 공안 탄압으로 눌렀다. 배천군에서 “간첩, 파괴, 암해도당들”에 대한 현지 공개 재판을 진행했고, 같은 시기에 황해남도와 개성을 중심으로 간첩을 체포했다는 북한 공식 매체의 보도가 잇달았다.

김일성파는 중공업 중심의 공업 성장 노선을 추진하면서 북한 경제가 자국에 종속되기를 원했던 소련의 반대에 부딪히고 관료 집단 내부의 반발에도 직면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관료 내부의 반대를 제압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구축하고 자주 노선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 경제는 전쟁의 폐허를 딛고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다. 남한의 ‘한강의 기적’ 전에 북한에 ‘코리아의 기적’이 있었다.

그러나 북한도 자본주의에 고유한 모순을 피하지 못해 오래지 않아 경제성장이 둔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의 세계화 경향이 유력해짐에 따라 심각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결론

한국전쟁은 냉전 제국주의 경쟁이 열전으로 번진 제국주의 간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냉전의 귀결이자, 그 냉전 경쟁을 더 격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한반도는 오랫동안 냉전의 최전선으로 남았고, 그 경쟁의 압력 속에 남북 지배자들은 독재를 강화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대중의 희생을 강요했다. 각각 자유민주주의, 사회주의를 운운했으나 두 사회 모두 진정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와는 조금치도 공통점이 없었다.

예전에 통찰력 있는 학자들은 냉전 하의 남북관계를 연구해, 남북이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서로 닮은꼴을 형성해 왔음을 지적했다. 남북의 두 국가들이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 적대하면서도 국가 형태나 통치 행위에서 비슷한 면이 많았던 것이다. 예컨대 1970년대 세계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남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유신 헌법을 밀어붙였는데, 그때 김일성 정권도 주석제를 도입하는 개헌을 단행했다. 남북 모두 비슷한 시기에 위기를 맞아 똑같이 1인 독재 강화로 대응했던 것이다.

이런 경험은 남북 양 체제의 본질적 성격이 같은 것과 관련이 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경쟁하면서, 그 경쟁에서 승리하려고 똑같이 한 정당이 국가 권력을 모두 틀어쥔 채 국가자본주의적 발전을 추동했다. 그 체제를 유지하려고 남북 지배자들은 공히 반대자를 탄압하고 노동계급을 엄청나게 착취했다. 남북 권력자들은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서로 싸우는 형제들”인 것이다(적대적 공존 관계). 그리고 이 점은 남한의 국가 형태가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오늘날에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의 두 사회 모두 경쟁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수 있는 거대한 노동계급을 창출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물론 냉전 하의 제국주의와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그 양상이 많이 달라졌지만 말이다.

레닌 등이 지적했듯이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동역학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은 오늘날에도 변함 없다. 이 점이 가리키는 바는 제국주의는 철저하게 사회 상층부에서 일어난 문제이지만, 그것을 근본에서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은 철저하게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을 고무하는 데서 나올 수 있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강력한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2020년 6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에서 드러나는 한반도 불안정 상황을 보면서, 우리는 계속 한국전쟁의 교훈을 곱씹어 봐야 한다.

MARX21